나비의 늪 1부
1,童 貞 祭
내가 미야누나를 만난것은 누나의 장례식날이었다.
오랫동안 병으로 앓고 있던 누나가 갑자기 숨을 거두자, 평소에 다정했던 누나의 친구
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우리집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이미 결혼을 하여 남의 아내가 돼 버린 사람도 있었고, 아직 처녀로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미야누나는 끼어있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은 누나의 친구 가운데 미야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우리집을 드나들었던 누나의 친구라면, 나는 그 얼굴 모습이며, 이름이며, 가정환경은
물론 그 성격까지도 환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미야누나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우리집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누나를 장사 지내는 공동묘지에 느닷없이 나타
났던 것이다.
삼월 중순이라 아직 땅 속은 얼어붙어 있었고, 그래서 무덤을 파는 두 사람의 인부는
곡괭이와 삽을 휘두르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
다.
인부들이 무덤을 파는 동안 누나의 관 주위로 몰려든 누나의 친구들과, 그리고 어머
니와 나는 나즉한 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꼭대기엔 아직도 흰 눈이 히끗히끗 묻어 있었고, 거기서 불어오는
듯한 싸늘한 바람이 아직 봄이라 느끼기엔 이른
것 같았다.
이윽고 누나의 관이 무덤 속으로 내려앉자 울음소리는 더욱 고조되었고, 나는 마지막
으로 울부짖으며 누나를 불렀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의 인부를 제외하곤 남자라곤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돌아서서 손수건으로 울음을 짓눌렀다.
그러면서 나는 몸부림치듯 울부짓고 있는 누나의 친구들을 무심코 돌아보다가 두 눈이
휘둥그래지고 말았다.
누나의 장례식에 참석한 누나의 친구들은 분명히 다섯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 사람이 더 나타났는지 어머니 옆으로 늘어선 누나의 친구들은 여섯
사람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지만 분명한 여섯 사람이었다.
장의사에서 보내온 영구차에 누나의 관을 싣고, 뒤따라 모두 차에 오를 때까지도 누나
의 친구들은 모두 낯익은 다섯 사람뿐이었다.
그렇다면 새로 나타난 한 여자는 공동묘지 입구에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모
르는 사이에 장례 행렬에 슬쩍 끼어든 것 같았다.
누구일까?
나는 그 새롭게 나타난 누나의 친구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부들이 사정없이 누나의 관 위로 흙을 덮기 시작하자 모두 고개를 떨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
에 그 여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비스듬히 등을 돌리고 있는 여자들 가운데서 나는 첫눈에 까만 스프링 코트에
까만 스카프를 목에 두른 그 여자의 뒷모습을 찾
아 낼 수 있었다.
귀 밑이 유난히 희게 보이는 그 여자는 다른 여자들 틈에 끼어 여전히 어깨를 들먹이
고 있었다.
그렇게 미리부터 까맣게 차려입은 여자는 그녀 혼자뿐인 것 같았다.
나는 여러가지 궁금증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왜? 우리집엔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무덤에 불쑥 나타난 것일까?
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우리집부터 먼저 나타나 어머니나 나를 위로해 주
는 것이 죽은 누나에 대한 우정(友情)이 아닐까?
그러한 나의 궁금증 밑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야릇한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나도 언젠가 본 일이 있는 누나의 친구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공연히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윽고 모두 무덤에서 물러나며 등을 돌리자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그녀의 모
습은 분명히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인(美人)이었다.
그녀의 미모는 곁에 늘어선 다른 여자들의 평범한 얼굴들과 대조되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였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무슨 불순한 동기에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뜻
밖에 아름다운 여자들과 마주칠 때 흔히 일어나
는 그런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눈여겨 보지는 않았다.
누나의 친구 가운데 그런 뛰어난 미인이 있을 줄 나는 미쳐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누나를 땅 속에 묻어 주는 장소에서 그렇게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기묘한 암시를 던져 주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무덤을 다 만든 인부들이 돌아가 버리자 누나의 친구들도 실신하다시피 되어
버린 어머니를 부축하여 무덤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무덤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것은 누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누나의 친구들은 어서 돌아가자고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좀 있다 돌아갈 테니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간신히 그들을 돌려 세웠다.
나는 멍하니 멀어지는 일행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잿빛 무덤 사이로 꼬불꼬불 나 있는 길을 따라 여자들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
었다.
마치 누나의 영혼이 눈에 띠지 않게 그들의 발걸음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맨뒤에서 까만 스프링 코트를 걸친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녀의 뒤로 달려가고 싶은 야릇한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뿐인 누나를 잃었다는 허망한 슬픔 속에 그녀를 다시 끌어들이고 싶은 그런 누나
에의 그리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덤 속의 누나가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힘없이 무덤으로 돌아서서 물끄러미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내 자신이 살아있지 않고 누나의 무덤과 일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갑자기 새로운 눈물이 타내렸다.
중천을 훨씬 지난 태양은 이제 막 서산으로 기울며 나의 기다란 그림자를 누나의 무덤
위에 던져 놓고 있었다.
누나가 무덤 속에서 나의 그림자를 꼭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분명히 누나와 약속했던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니?
죽기 며칠 전 누나는 모기 같은 소리로 몇 번이나 그렇게 내게 부탁했었다.
나는 그때 눈물을 삼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밤 열 두 시까지
자기 무덤을 지켜 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
다.
그래야만 자신의 영혼이 지상의 마귀들에게 붙들리지 않고 하늘로 무사히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누나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앙상하게 뼈만 남은 누나의 한 손이 나를 손을 꼭 움켜쥐었던 그 쓸쓸한 감촉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누나는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두덩이 핼쓱하게 꺼져 버린 누나의 희미한 두 눈에서 그녀의 영혼을 보는 것
같았다.
누나는 언제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문학을 좋아했고, 그래서 그런지 상상력이 풍부하여 언제나 기발한 공상을 즐겼다.
따라서 자기 영혼의 무사한 승천을 위해서 죽기 전부터 걱정을 하고 있었던 그녀의 심
사를 나는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온갖 잡다한 귀신들이 우굴거리는 공동묘지에 자기가 묻힐 것을 누나는 미리 알고 있
었고, 그래서 그런 마귀들의 틈바구니에서 자기
영혼을 하늘까지 안전하게 올려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자기 무덤을 지켜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나는 누나의 첫마디에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공동묘지에서 혼자 밤 열 두 시까지 버틴다는 것은 웬만한 간담으로선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이 죽은 누나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조금도 두렵지가 않았
다.
나는 인부들이 삽으로 아무렇게나 다져 놓고 돌아가 버린 무덤 주위를 돌아가며 손을
보고 있었다.
아직도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분명한 실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누나의 무덤을 그렇게 손질하는 것이 마치 누나의 잠든 얼굴에서 파리를 쫒아 버리는
그런 기분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았다.
이윽고 내가 무덤 손지를 끝내고 무덤 앞에 마주 웅크리고 앉아 잠시 흙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눈 앞의 무덤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나는 소스라치듯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조금 전 맨뒤에서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가던 까만 스프링코트의 누나 친
구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내려다보더니
순호지? 정말 몰라보겠어,
하고 방긋 웃으며 나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나는 그녀의 우아한 미소에 눈이 부셨다.
내가 부시시 일어나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와 마주서자 그녀는 다시 이렇게 입을 열었
다.
순호가 나를 모르다니?
그녀의 입에서 두 번이나 그렇게 내 이름이 흘러나오자 나는 더욱 어리둥절해지고 말
았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그녀는 잠시 나를 곱게 흘겨보고 있더니,
그런 말이 어딨어?
하며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벌써 육 년이 넘었으니 못 알아 보는 것도 당연해. 그럼 순호가 중학교에 배
정 받던 날은 기억하고 있겠지?
그 소리에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뒤따라 번개처럼 나의 머리 한쪽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련한 기억의 실마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그날 순지하고 함께 거기 갔던 여학생 기억 나니? 그게 바로 나야. 호호...순호는 그
때 이제는 중학생이 된다고 너무나 기뻐서 운동
장에다 함부로 오줌을 누다가 학교 선생한테 혼이 나구, 이제 기억이 나니?
그제야 나는 그만 입이 벌어지며 피식 웃고 말았다.
순지라면 무덤 속의 누나의 이름이었고, 운동장에다 함부로 오줌을 갈기다가 혼이 났
다면, 그것은 분명 내 자신의 추억 속에 선명하게
기록되어진 일이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미야라는 이름의 누나 친구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
다.
그때 누나와 미야누나는 여학교 이학년의 단발머리 소녀였고, 나는 간신히 코흘리개
신세를 면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미야누나의 모습을 나는 똑똑히 기억할 수는 없었다.
다만 눈 앞에 서 있는 완전히 성숙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희미한 옛날의 영상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네, 이제 알겠어요.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운동장에다 함부로 오줌을 갈겼던 철 없는 나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보았고, 또한 알고 있다는 사실은 재미있고 부끄
러운 일이었다.
나는 겨우 스무 살이었고, 미야누나도 죽은 누나와 동갑이라면 스물 다섯일 것 같았다
.
그때 저한테 스케이트를 사 주셨죠?
나의 물음에 미야누나는 미소를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러한 자기 선물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미야누나는 무척 기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스케이트 한 짝을 잃어버렸어요. 중학교 삼학년때였어요. 한 짝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지요.
그래? 그럼 탈 수가 없겠네?
그럼요. 두 짝이 모두 있다고 해도 이제는 탈 수가 없어요. 발이 이렇게 커다랗게 돼
버렸잖아요?
그러자 미야누나는 까르륵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미야누나의 얼굴은 눈물을 흘린 탓 인지 약간 발그래져 있었다.
그러데, 그동안 어떻게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지요?
나의 물음에 미야누나는 잠시 미소를 머금고 고개만 끄덕이더니 갑자기 슬픈 얼굴로
누나의 무덤을 돌아보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정말 몰랐어. 누구자 한 번은 가야겠지만........
그리곤 말 끝은 목구멍 밑에서 걸리고 말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잠자코 곁눈으로 미야누나의 얼굴을 새삼 훔쳐보았다.
가느다란 눈썹 아래 쌍까풀진 까만 두 눈이 호수처럼 맑고 잔잔했다.
그리고 오똑한 코와 알맞게 도톰한 입술이 화장기라곤 전혀없이 분홍빛으로 촉촉히 젖
어 있었다.
결혼을 했을까?
아마 했을지도 모르지
스물 다섯이나 됐는데, 더구나 저런 보기드문 미인을 그런 나이가 되도록 세상의 남
자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는 없잖아?
아냐, 아직도 결혼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남자를 고르다 보면 미인일수록 늦어지는
수도 있으니까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은근히 그녀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단순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미야누나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분명히 알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선뜻 그렇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결혼을 했더라도 미야누나의 깊숙한 두 눈에 드리운 침울한 그림자로 미루어, 그리 행
복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미야누나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풍겨오는 그 침울한 분
위기는 무언지 깊은 곡절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입 안에서 뱅뱅 돌고 있던 그 말을 나는 간신히 뱉아내고 말았다.
누난, 아직 결혼 안 했어요?
그러자 미야누나는 잠시 두 눈이 둥그래지더니 이내 배시시 웃어 버리며 고개를 끄덕
였다.
왜 여태 안 하셨어요?
나는 짖궂게 다시 물었다.
안 한게 아니라 못 한거지.
이렇게 말하는 미야누나가 나는 어울리지 않게 겸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결혼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문득 무덤 속의 누나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아무리 지켜 보아야 순지가 다시 살아올 리는 없쟎니?
하고 미야누나가 눈짓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먼저 가세요. 난 좀더 있다 돌아가겠어요.
그만 돌아가자니까. 난 순호를 데리러 여기 다시 온 거야.
나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전 누나하고 약속이 있어요.
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약속이라니? 순지하고 약속이 있단 말이니?
미야누나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약속이니? 죽은 사람하구? 응??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나한테는 말할 수 없니? 비밀이야?
미야누나는 다구쳐 물었다.
그제야 나는 하는 수없이 사실대로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자 미야누나는 한참이나 말문이 막힌 듯이 잠자코 있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럼 나도 여기 남겠어. 괜찮겠지?
나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놀라웠고 한편으론 고마왔다.
그러나 나는 미야누나의 그런 얘기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누난 그만 돌아가세요. 밤이 되면 춥기도 하고, 더구나 여자 몸으로 열 두 시까지 그
렇게 머물 수는 없잖아요?
난 괜찮아, 조금도 상관 없어. 나 때문에 순지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그럴리야 있겠어요? 누나도 오히려 기뻐할 거예요. 그러나 이건 제개 부탁하는 거예
요. 어서 돌아가세요.
괜찮다니까, 나도 여기 남을 테야.
미야누나는 누나의 무덤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미야누나의 억지를 나는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은근한 생각마저 떠올랐다.
순지라면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될까 하고 많이 걱정했을 거야.
미야누나는 나를 힐끔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미야누나의 나이가 스물 다섯이라곤 선뜻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나는 문득 미야
누나와 나 사이의 다섯이라는 연령 차이가 오무
라들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윽고 이른 봄날의 짧은 해가 저물자 날씨는 갑자기 추워지기 시작했다.
음산한 공동묘지 위로 갈색의 황혼이 짙어 오더니 어느새 그것은 어둠으로 변했다.
알 수 없는 이상한 공포가 어둠을 타고 누나의 무덤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미야누나와 나는 누나의 무덤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를 둘러싸는 어둠의 부피가 점점 두꺼워지자, 우리는 한동안 전신이 굳어진 채 묵
묵히 앉아 있었다.
순호야, 춥지?
이윽고 미야누나가 조그만 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아뇨. 전 괜찮지만, 누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때요?
추우냐고 물었을 뿐이야.
미야누나는 한 마디로 나의 입을 막더니, 내 곁에 바싹 다가앉아 오버의 한 자락으로
내 어깨를 덮어 주었다.
괜찮아요.
사양할 것 없어, 운동장에 함부로 오줌을 싸대던 꼬마가 어느새 이렇게 어른이 됐어.
미야누나는 잠시 키들키들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머리 속으로 내가 그렇게 오줌을 갈기고 있던 장면을 떠올려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미야누나의 따스한 체온이 조금씩 전해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미야누나는 한 팔로 나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순호도 이렇게 해!
하고 자기 몸을 더욱 내 곁으로 바싹 밀어왔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다가 미야누나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둘러안았
다.
탄력 있는 미야누나의 허리통이 문득 나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어때? 조금 덜 춥지?
미야누나가 나의 귓전에서 소근거렸다.
그녀의 보드러운 입김이 나의 뺨을 어지럽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훨씬 따뜻해졌어요.
그 봐! 순호 혼자 남았으면 어떡할 뻔했지? 이래서 사람은 혼자선 못산다는 거야. 그
렇쟎아?
그녀의 따뜻한 입김이 나의 귓 속으로 파고들며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야누나가 나의 허리를 살그머니 꼬집었다.
나는 다시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문득 미야누나에게서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느낀 것 같았다.
밤이 점점 깊어가자 추위는 더욱 심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짐승의 울음 같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바람 소리에 뒤섞여 울려왔다.
미야누나는 몸을 움츠리며 나의 허리를 바싹 껴안았다.
무서운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귀신들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공동묘지에 처음 들어온 누나의 영혼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날뛰는 잡
귀들의 소리인지도 몰랐다.
그 소리는 여전히 괴괴한 어둠 속의 적막을 뚫고 울려오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미야누나는 어느새 얼굴을 나의 턱 밑에다 바싹 갖다대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예요.
내가 입을 열자 그제야 미야누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몰아쉬며 나의 손을 꼭 움켜쥐었
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러나 귀신들의 아우성 같은 기괴한 소리는 여전히 바람 소리와 함께 울려오고 있었
다.
이윽고 그 소리에 차츰 익숙해지자 두려움은 약간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미야누나가 조그만 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순지누나가 살았을 때의 얘기였다.
미야누나가 순지누나와 여학교의 한 반에 있을 때 수학여행을 가서 선생들을 골려 주
었던 그런 얘기를 미야누나는 나직한 소리로 속삭
이듯 천천히 해 나갔다.
그것은 꼭 그런 얘기를 나에게 들려 주고 싶어서가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으므로 해
서 스며드는 공포감을 물리치기 위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 얘기 속에서 나는 순지누나가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는 젊은 국어선생 얘기를
들었다.
그는 시인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술을 잘 먹었고, 그래서 수학여행지 경주에서 미야누나와 순지누나는 그 시
인선생에게 법주를 사드렸다고 했다.
술이 취한 선생은 느닷없이 순지누나에게 자기는 순지를 사랑하노라고 털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미야누나는 잠시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순지누나보다는 누나가 훨씬 미인인데, 그 선생은 왜 그랬을까요?
그러자 미야누나는 웃음을 삭이더니, 미인의 기준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모두 틀리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다시 얘기를 끌어나갔다.
그러는 미야누나의 얼굴과 나의 얼굴은 거의 마주닿아 있었고, 미야누나가 그렇게 얘
기를 계속하자 나는 마치 미야누나와 입을 맞추며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순지누나는 너무 당황하여 그만 도망을 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여관방에 미야누나와 나란히 들어누웠을 때 순지누나는 토라진 음성으로 술이
취해서 그런 귀중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은 자기
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는 것이었다.
미야누나의 얘기가 거기까지 왔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어둠 속에서 여자의 비명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번개소리처럼 일어났다가 사라
졌다.
우리는 마침내 와락 포옹하고 말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미야누나의 머리 냄새가 마치 알큰한 아편 냄새 같은 강한 자극으로 나의 후각을 마비
시켰다.
뒤따라 그녀의 뭉클한 젖가슴이 나의 손 끝에 감촉되었다.
그러나 여자의 비명같은 날카로운 소리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미야누나는 마침내 얘기를 더 계속할 용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면서 자꾸만 머리를 나의 가슴으로 밀어넣었다.
순호야! 지금 몇 시나 됐을까?
미야누나가 숨을 죽인 채 속삭였다.
나는 오버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 간 손전등을 꺼냈다.
왜? 불을 켤려고?
미야누나는 불안에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그래야 시계를 보지요.
괜찮을까? 불을 켜도?
내가 손을 움직이려 하자 미야누나는 재빨리 나의 손을 제지하며,
그래두 공연히 우리가 있는 장소를 알리면..........
하고는 침을 꼴깍 삼키며 말 끝을 흐렸다.
나는 공포 속에서도 슬그머니 웃음이 밀려나왔다.
미야누나는 마치 우리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군에게 포위당해 있는 줄 착각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귀신이라든가 도깨비들은 불빛만 보면 줄행낭을 친단 말이예요. 옛날 얘기
에도 있잖아요?
정말 그럴까?
이렇게 반문하는 미야누나의 조그만 목소리는 마치 일곱 살쯤 되는 계집애의 겁에 질
린 소리같았다.
이윽고 나는 불을 켜서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 한 시 반이었다.
여태 이렇게 밖에 안 됐을까?
미야누나는 불빛에 자기 손목의 시계마져 비추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귀신들의 세계에선 시간은 무척 느릿느릿 흐르는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면 안 될까?
미야누나가 여전히 겁에 질린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죽은 누나와의 약속은 분명히 밤 열 두 시까지였다.
그러나 열 두 시 후에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를 나는 미처 생각해 보지
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죽은 누나의 마지막 부탁인데 하룻밤쯤 어디에서 어떻게 보낸들 그것이 무슨 문제랴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을 두고 한 생각이었다.
미야누나가 함께 남아있는 이상 나의 생각을 고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쯤 순지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갔을 거야. 불과 삼십분 상관인데........
미야누나의 목소리가 조금 또렷해지고 있었다.
귀신들의 세계에서 이제 곧 벗어난다는 희망이 그렇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